유신 최후의 날, '그때 그 사람들'②

by 주권자전국회의 posted Dec 20,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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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신 최후의 날, <그때 그 사람들>②

 

최한욱 방송인

 

이 글은 주권자전국회의 회보 <주권자> 4호에 게재되었습니다. 

 

“김 부장, 또 쏠라꼬?”

“다까끼 마사오! 누구라도 죽으면 그냥 썩은 내 피우는 쓰레기인 거예요.”

 

궁정동 ‘대행사’(중정 의전과장이었던 박선호의 법정 진술에 따르면 당시 중정 직원들은 대통령과 측근 2, 3인이 참가하는 안가 연회를 ‘대행사’, 대통령이 여성들과 홀로 하는 연회를 ‘소행사’라고 했다) 도중 잠시 자리를 비운 김 부장(백윤식 분)은 민 대령(김응수 분)과 주 과장(한석규 분)에게 마지막 지시를 하고 돌아와 차 실장(정원중 분)과 각하(송재호 분)를 차례로 저격한다.

 

그때 그 사람들2.jpg

 

하지만 총이 고장 나고 차 실장은 그 사이 피 흘리는 각하를 버려 둔 채 화장실로 숨는다. 김 부장은 주 과장에게 총을 구한 후 다시 연회장으로 돌아와 차 실장을 사살하고 유신의 두뇌에 최후의 한발을 발사한다.

 

유신독재는 이렇게 허무하게 종말을 고했다. 박정희는 자신의 왼팔이었던 김재규에 의해 살해됐다. 박정희는 사인은 엄밀히 말하면 ‘정치적 자살’이었다. 자신의 왼팔로 자신의 머리를 쐈기 때문이다. 김재규는 왜 박정희를 쐈을까?

 

1백만 명이냐, 1명이냐? 그것이 문제였다

 

“걱정 마십쇼. 각하. 캄보디아에서는요. 백만 명이나 죽였어요. 우리도 한 만 명. 딱 만 명만. 탱크로 그냥 깔아버리면. 까짓 것 충분합니다. 쥐 죽은 듯이 엎어져 자빠져 있을 것들이 그냥."”

 

저격 직전 차 실장은 각하에게 이렇게 말한다. 마침 자리로 돌아온 김 부장은 “야, 인마 차 실장. 뭐? 만 명. 너 하나 죽으면 돼”(실제는 “이 버러지 같은 새끼”라고 말했다)라고 한 후 차 실장을 쐈다.

 

일반적으로 김재규가 박정희를 저격한 이유는 차지철 경호실장과의 갈등 때문으로 알려져 있다. 10·26 당시 궁정동 연회에 동석했던 김계원 비서실장의 회고록에 의하면 김재규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공화당의 실정과 시국을 강경하게 몰고 가려는 자들 때문에 각하의 판단이 더 흐려지고 있습니다. 특히 차 실장이 문제입니다. 모든 시국의 불안과 사태 악화가 그로부터 기인한 것이 많으며 그가 무서워 당 간부들도 바른 말로 대통령께 진언 드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비서)실장님, 부마사태는 단순히 폭동 진압방식으로 제압을 하면 부산시민 전체가 일어나 봉기할 것입니다.” 

 

“실장님! 차지철 저놈 오늘 해치울까요?”, “대위밖에 안 지낸 자식이 장군, 장관 알기를 우습게 여겨! 내가 하는 일을 모조리 사사건건 방해하며 각하께 바르게 보고하지도 않고 내게 불리하게만 말씀을 드리니 각하께서 중정이 올리는 보고를 통 믿으셔야지요.”(김계원, <더 파더 하나님의 은혜>, SNS미디어, 2013)

 

이 같은 증언이 사실이라면 김계원은 김재규의 ‘거사’를 미리 알고 있었던 셈이다. 하지만 김계원은 각하에게 그 어떤 언질도 주지 않았다. 그도 암묵적으로 ‘거사’를 지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김계원은 군사재판에서 내란목적살인 및 내란중요임무종사미수죄로 사형을 선고받았다가 무기징역으로 감형된 후 1982년 형집행정지로 풀려났다.

 

차지철은 27세에 공수특전단 대위로 5·16쿠데타에 참가했다. 1963년 중령으로 예편하고 국회의원에 출마, 4선 의원을 역임한 뒤 1974년 육영수 피살사건 이후 박종규의 후임으로 경호실장에 취임했다. 차지철은 5·16때부터 ‘피스톨 박’으로 불렸던 박종규와 함께 박정희의 양 팔 노릇을 하던 실제 중에 실세였다. 

 

차지철은 자신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 경호실장을 차관급에서 장관급으로 격상했다(경호실장은 2008년 차관급으로 조정되었다가 2013년 3월 박근혜 대통령이 다시 장관급으로 개편했다). 현역 중장 또는 소장을 경호차장으로 두고 현역 준장을 차장보에 임명했다. 비상시에는 수도경비사령부를 지휘할 수 있도록 법도 바꿨다. 청와대 연병장에서 장, 차관들을 초청해 ‘국기하기식’이라는 경호부대의 사열식까지 진행하며 권력을 과시했다. 경호부대는 히틀러의 친위대 SS제복을 연상시키는 복장을 입었다. 1979년에는 차지철이 박정희의 후계자를 노린다는 말이 공공연하게 나돌았다.

 

이 같은 차지철의 월권과 전횡에 김재규가 큰 불만을 품고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단지 차지철에 대한 불만 때문에 김재규가 박정희를 살해했다고 보는 것은 사건을 지나치게 단순화하는 것이며 박정희의 책임을 차지철에게 떠넘기기 위한 해석이라고 할 수 있다. 어쨌건 문제의 핵심은 박정희였다. 

 

차지철은 박정희에게 “캄보디아에서도 300만 정도 죽여도 까딱없었는데 우리가 100만, 200만 정도 죽여도 걱정 없습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영화에서는 100만 명을 1만 명으로 오히려 축소했다). 이 같은 발언은 차지철의 광기를 입증하는 대표적인 사례로 종종 인용된다.

 

하지만 캄보디아 발언은 차지철이 박정희를 부추기기 위해 나온 말이 아니다. 김재규는 부산을 다녀온 뒤 부산소요는 불순세력이나 신민당의 선동 때문이 아니라 민중의 봉기이며 5대 도시로 확산될 것이라고 보고했다. 그러자 박정희는 역정을 내며 “앞으로 서울에서 4·19와 같은 데모가 일어난다면”, “이번에는 대통령인 내가 직접 쏘라고 발포명령을 내리겠다”고 말했다(한홍구, <유신>, 한겨레출판, 2014). 이에 차지철이 맞장구를 친 것이다. 차지철은 박정희가 하고 싶은 말을 대신한 것뿐이었다. 

 

박정희는 캄보디아 발언을 듣고 ‘얼굴에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김재규에게 “정보부가 좀 무서워야지. 그렇게 물러서야 무슨 일을 제대로 하겠나?”라고 면박을 주었다고 한다(문영심, <바람 없는 천지에 꽃이 피겠나>, 시사IN북, 2014). 

 

차지철은 박정희를 좌지우지할 만한 인물이 아니었다. 박정희가 말년에 차지철을 총애한 것은 그가 누구보다도 자신을 잘 따랐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차지철은 박정희의 ‘충견’이었다. TV드라마 <제3공화국>에 차지철(이대근)이 교회에서 “주여! 청와대 안에서는 각하가 저의 하나님이십니다”라고 기도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는 차지철의 됨됨이를 여실히 보여주는 장면이다.

 

캄보디아 발언은 차지철의 머리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각하의 마음을 차지철이 읽은 것이었다. 그리고 김재규는 후안무치한 박정희의 태도 때문에 결정적으로 거사를 결심하게 된다. 그대로 놔두면 한국도 ‘킬링필드’가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김재규는 혁명가였을까, 돈키호테였을까?

 

김재규의 총구는 애초부터 ‘유신의 심장’(박정희)를 겨냥하고 있었다. 김재규가 차지철을 먼저 쏜 것은 단지 그 길목에 그가 서 있었기 때문이다. 주인을 공격하려면 경비견부터 처리하는 게 순서다. 김재규는 혁명가였을까? 돈키호테였을까? 

 

“혁명은 칵테일 파티가 아니요. 피가 튀는 쟁투란 말이요.” 

 

“진짜 야수의 심정으로 쐈어. 민주주의를 위하여.”

 

<그때 그 사람들>에서 김 부장은 자신의 ‘거사’를 ‘혁명’이라고 말한다. 김재규는 법정에서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쏘았다”고 했다. 그는 최후진술에서 ‘혁명’의 목적을 5가지로 밝혔다.

 

“저의 10월 26일 혁명의 목적을 말씀드리자면 다섯 가지입니다. 첫번째가 민주주의를 회복하는 것이요, 두번째는 이 나라 국민들의 보다 많은 희생을 막는 것입니다. 세번째는 우리 나라를 적화로 부터 방지하는 것입니다. 네번째는 혈맹의 우방인 미국과의 관계 건국 이래 가장 나쁜 상태이므로 이 관계를 완전히 회복해서 돈독한 관계를 가지고 국방을 위시해서 외교경제까지 보다 적극적인 협력을 통해서 국익을 도모하자는 데 있었던 것입니다. 마지막 다섯번째로 국제적으로 우리가 독재 국가로서 나쁜 이미지를 갖고 있습니다. 이것을 씻고 이 나라 국민과 국가가 국제 사회에서 명예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김재규의 진술에 따르면 그의 혁명은 친미, 민주, 반공혁명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5·16쿠데타의 혁명이념과 크게 다르지 않다. 김재규의 거사는 부마항쟁이 4·19와 같은 혁명으로 발전되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 

 

즉, 생존을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김재규의 ‘거사’는 혁명이라기보다는 쿠데타라고 보는 편이 더 정확하다. 그가 원한 것은 권력의 교체가 아니라 권력자의 교체였기 때문이다. 만일 김재규의 혁명이 성공했더라도 한국 사회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김재규가 혁명가였다면 그는 얼치기 혁명가라고 해야 할 것이다. ‘거사’ 직후 김재규는 안가에 있었던 육군 참모총장 정승화와 함께 남산으로 향한다. 김재규는 수행비서였던 박흥주 대령이 중정과 육본 중 어디로 가는 게 좋겠느냐고 묻자 정승화가 말을 가로채 육본으로 가자고 했고 김재규는 아무 생각 없이 동의했다고 한다. 김재규가 육본으로 향한 것은 결정적 패착이었다.

 

만일 김재규가 남산으로 향했다면 사태는 크게 달라졌을 수도 있었다. 일단 자신의 안전을 확보하면서 정승화를 인질로 군부를 제어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중정의 주특기를 활용해 사건을 조작할 수도 있었다(예컨대 차지철의 소행으로). 하지만 김재규는 전두환을 비롯해 박정희 키드들이 득실거리는 육본으로 향했다. 호랑이 아가리에 스스로 머리를 집어넣은 꼴이다. 

 

그렇다면 왜 김재규는 육본으로 향한 것일까? 아마도 그 이유는 둘 중에 하나일 것이다. 그가 ‘혁명’(혹은 쿠데타)와 같은 큰일을 도모할 능력이 없는 얼간이였거나 아니면 사태를 낙관할 만한 확실한 담보(이 문제는 3편에서 다루기로 하겠다)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김재규는 피의자 신문조서에서 “이조시대 이래 2인 이상이 역모를 해서 성공한 사례를 볼 수 없었기 때문에 혼자서 골똘히 구상했다”고 진술했다. 하지만 1명이 역모를 해서 성공한 사례는 더더욱 없다. ‘거사’ 이후 이해할 수 없는 김재규의 안일한 행동들이 결국 그를 교수대로 향하게 했다.

 

김재규는 마지막 남은 한 발을 자신의 머리에 쏜 셈이다. 임상수 감독이 유신 최후의 날을 코미디로 재연한 것은 정말 탁월한 선택이었다. 10·26사건은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희극적인 비극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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